영화에서 배설은 이순신 휘하 장수로 나온다. 해전을 반대하며 명령을 받들지 않다가 끝내 야음을 틈타 배를 타고 도망치고, 동료인 안위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이는 영화 초반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다. 이순신이 가진 무기뿐만 아니라 휘하 장병의 사기 또한 바닥이었음을 실감 나게 보여줬다. 영화적 장치로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배설의 후손인 경주 배씨 문중으로서는 황당할 일이었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사실에서 배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다시 터지는 정유재란의 시기(1597년 초)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상관은 원균이었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해 그 대신 통제사에 올라 있었다. 2월 말 체포된 이순신은 한 달 넘게 취조를 받으며 옥고를 치렀다. 다행히 4월 1일 석방되었으나,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원대 복귀한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이 재침하자, 7월 21일, 원균은 칠천량(지금의 거제도)에서 그들과 크게 한판 붙어 대패하고 만다. 배설이 12척의 판옥선을 끌고 퇴각해 전라 좌수영 쪽에 있던 이순신과 만난 것이 그 다음날이다.
그런데 배설의 행동이 이상했다. 원균은 이미 죽었고 통제사의 일은 다시 이순신에게 맡겨졌는데, 좀체 그의 명령 또한 따르려 하지 않고, 잦아지는 일본군의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달쯤 뒤 《난중일기》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해남)에서 뭍으로 내렸다’고 돼 있다. 8월 30일의 일이었다. 거기까지는 정상적이다. 하지만 이틀 뒤인 9월 2일, 《난중일기》에는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쳤다’고 적고 있다. 탈영이었다.
명량해전은 9월 16일에 터졌다. 배설이 탈영하고 보름 뒤다. 그러니 배설의 행동반경은 ‘열두 척 신화’의 명량해전과는 아주 멀다. 그의 최후 또한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로, 《선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설이 복주(伏誅)되었다.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1599.3.6.)
배설은 왜군과 내통하거나 이순신을 죽이려 하거나 거북선을 불 지르려 하지 않았다. 밤중에 배 타고 도망가다 화살을 맞아 죽지도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탈영했으며, 한참 뒤에야 다른 사람에게 참수됐다. 팩트는 ‘탈영’과 ‘참수’라는 것뿐이다.
사실 배설은 꽤 유능한 장수였다. 전공이 뛰어나고 백성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진주(晉州)에 있던 그가 경상우수영으로 발령 나자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가 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선조실록》, 1595.2.4.) 하는 바람에 부임이 늦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 영악하기도 했다. 진주에서의 소란은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는 해사(海事)를 지독히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질(水疾) 즉, 뱃멀미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도 ‘용맹한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舟師)에 쓸 수 없을 것’(《선조실록》, 1595.2.4.)이라 했다. 백성 핑계로 부임을 미룬 속내는 그것이 아니었을까?
바다가 싫었지만, 배설은 본영에 이르러 충실히 복무했고, 칠천량 전투에서도 할 수 있는 한의 역할을 다했다. 특히 마지막에 그가 건져 나온 12척의 판옥선은 온전히 이순신의 손에 넘어가 유명한 ‘열두 척 전설’의 뒷받침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