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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금융업계에 잇달아 해킹 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기업의 신뢰 회복과 보안 거버넌스 강화가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전 국민이 사용하는 통신이나 금융업의 개인정보 유출은 누구나 보안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한다. 김형진 교수는 보안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몇 년 사이 IoT 기기들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스마트폰, 태블릿PC뿐 아니라 가전제품과 자동차도 커넥티드 디바이스로 변모하고 있어요. 이는 모두 인터넷망으로 연결돼 기기 간 접속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보안 기능이 핵심이 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보안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통해 보안 키를 생성하고, 생성한 보안 키를 저장한 뒤 시스템 내 저장된 보안 키와 비교하는 인증 과정을 거쳐 접근 권한을 판별했다. 하지만 이는 보안 키를 저장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해킹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약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알고리즘을 탑재해야 해 시스템 부하가 커진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하드웨어 기반의 보안 기술이다.
“반도체 소자의 미세한 구조 차이로 반도체 칩의 성능은 제각각(산포)인데, 반도체 칩이 100개라고 가정할 때 1등부터 100등까지의 성능을 알고 있다 해도 물리적으로 이를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개념을 ‘물리적 복제 불가 함수(PUF, Physical Unclonable Function)’라고 합니다. 이를 메모리 반도체에 접목한 것이 하드웨어 기반의 물리적 복제 방지 기술입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를 쓰고 지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산포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보안을 더 강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김형진 교수 연구팀은 지난 8월 반도체 소자의 일종인 멤리스터 기반의 PUF 기술을 개발해 나노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ACS 나노』(IF=18.1)에 발표했다. 본 연구는 기존 2차원 멤리스터 어레이 기반 PUF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차원 멤리스터 어레이 기반 PUF는 난수 공간이 제한적이고 보안성이 낮다는 한계가 있었다. 김형진 교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멤리스터 어레이를 한 층 더 쌓은 3차원 크로스바 어레이라는 아이디어를 새롭게 제시했다. 특히 두 층의 전압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비교기 회로를 사용해야 하는데, 추가 회로 없이 3차원 적층형 메모리 어레이 내에서 바로 비교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기존에 물리적 복제 불가 함수에 대한 개념도 있었고 3차원 메모리에 대한 개념도 있었지만, 이 두 개념을 융합한 시도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기반의 컴퓨팅 보안 기술로 평가받았죠. 앞으로 보안 칩으로 상용화되기를 바랍니다.”
김형진 교수가 반도체 지문이라 불리는 PUF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은 4년 정도 된다. 그러나 김형진 교수의 주력 연구 분야는 사실 보안 기술이 아니다. 그보다는 메모리 반도체 소자 연구로, 그를 활용한 메모리 반도체 기반의 컴퓨팅 응용 분야에 관심이 많다. 이번에 발표한 메모리 반도체 기반의 컴퓨팅 보안 기술도 메모리 반도체를 활용한 컴퓨팅 응용 분야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활용한 컴퓨팅 응용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2024년 반도체 소자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 학술대회인 IEDM(국제전자소자학회)에서 김형진 교수가 발표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기반의 인공지능 연산 기술도 그중 하나다. 기존 컴퓨팅 시스템은 메모리와 프로세서가 분리돼 있어 연산을 수행할 때 데이터가 이동해야 하는데, 빅데이터 처리가 필수적인 인공지능 연산에서는 효율성이 떨어지고 에너지 소모도 많다. 그래서 김형진 교수팀은 멤리스터의 상태 조절로 메모리 반도체 내에서 인공지능의 추론 연산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인공지능 반도체 기술을 개발했다.
이와 같이 프로세스가 아닌 메모리 내에서 바로 연산을 수행하는 기술은 메모리 반도체를 활용한 컴퓨팅 응용 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개념을 어느 분야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연구자의 창의력에 달렸다.
“이번에 개발한 멤리스터 크로스바 어레이를 하드웨어 보안, 인공지능 가속화 등 다양한 응용 분야 중 어느 분야에 적용할 것인지 참신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융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항상 전공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전공 분야만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한계 짓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신소재공학부 내에 국내에서는 3번째로 ‘전자회로’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학문 간 경계를 넘어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김형진 교수팀은 동일한 응용 분야를 연구하더라도 다른 재료나 소자를 활용하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연산속도를 높이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반도체 소자를 멤리스터가 아닌 커패시터(Capacitor, 축전기) 소자로 적용했다. 이는 멤리스터 반도체 소자를 활용한 연구들이 갖고 있던 한계, 즉 전력 소모가 크다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도 최초로 시도하는 것이다.
김형진 교수는 올해 12월에 열린 IEDM에서 본 연구에 대한 성과를 발표했다. 그는 2022년부터 4년 연속으로 IEDM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100편이 넘는 논문을 SCI급 국제 저널에 게재했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대한전자공학회가 주관하고 해동과학문화재단이 후원한 제34회 해동젊은공학인상도 수상한 바 있다. 김형진 교수는 박사 과정 때 해동과학문화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어 감회가 남달랐다는 소회를 밝혔다. 공학자로서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공학자는 새로운 현상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산업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어떠한 기술적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지 상용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학자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연구에 매진하겠습니다. 한양인들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