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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아프리카연합이 G20(주요 20개국)에 가입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부상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젊은 인구 비중이 가장 높은 대륙이기 때문에 그 성장 잠재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지난 5월 우리나라도 아프리카 48개국을 초청해 정상회의를 주재하며 교류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기회의 땅 아프리카는 불안정한 정치와 재정, 치안, 인권 문제 등의 리스크도 안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 등의 개발도상국을 통칭해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고 부릅니다. 글로벌 사우스는 내전이나 쿠데타가 빈번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들이라는 인식이 있죠. 하지만 근대유럽 국가들도 주권국가 건설 시 기나긴 폭력과 전쟁의 과정을 거치며 주권이라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국내 통치권을 확립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1950~60년대에야 비로소 유럽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주권형성을 이뤄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잣대로 실패 국가의 낙인을 찍거나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내정에 개입하려 하는 것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최근 <지역 안보에서 글로벌 국제관계로>라는 단행본을 발행한 은용수 교수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일침을 놓았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이 바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21세기 국제질서 변동의 맥락에서 새롭게 재조명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 미시간주립대학(MSU) 석좌교수인 모하메드 아유브(Mohammed Ayoob) 교수, 아메리칸대학(AU) 석좌교수인 아미타브 아차랴(Amitav Acharya) 교수와 공동집필한 것인데, 특히 모하메드 아유브 교수의 지적 토대에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유브 선생님은 1970년대 중반부터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론으로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의 불안정한 국내 정치의 원인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며 비판해 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글로벌 사우스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서발턴 리얼리즘(Subaltern Realism)’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발턴 리얼리즘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19~20세기에 그들이 겪은 서구 제국들의 식민통치로부터 기인한다. 이들은 서구의 식민 통치국들이 그어놓은 인위적인 국경선과 독립 후 그들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국내 정치 엘리트들의 정통성 결여로 주권국가로서 안정화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과 미국이 주도한 근대 국제사회는 주권과 인권을 가장 중요한 보편원칙으로 규범화했다. 서구 주도의 국제사회화 과정에서 이제 막 독립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주권국으로서 국내 통치와 사회 안정을 이뤄내는 동시에, 반대 세력을 인도주의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국제규범에 놓이게 됐다. 이는 상충하는 기대 혹은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전쟁과 안보 불안은 18~19세기 서구 제국의 식민지배 역사가 20~21세기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1945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전쟁과 무력충돌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과거 서구 제국 폭력의 역사로부터 출발하는 서발턴 리얼리즘이 갖는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함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석학들의 통찰이다.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은용수 교수는 국제질서가 다극화되는 것을 혼란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며 기존의 고착화된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국의 경제적, 안보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계기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단기적 효용성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글로벌 사우스와의 호혜적 관계와 상호신뢰를 구축하기에는 한계가 있죠. 그들의 지역적 특수성과 안보 불안을 그들의 시각과 입장에서 공감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공감은 곧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안보적 불안이나 경제적 필요가 무엇인지 충분히 마음으로 이해하고 연민(Compassion)할 수 있습니다. 외교는 단순히 단기적 이익을 위해 행정적 절차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한 진정한 이해와 이를 통한 상호신뢰가 구축될 때 비로소 외교의 지평이 넓어지고 지속될 수 있습니다.”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은용수 교수는 비판적 구성주의, 탈식민주의 등의 이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 중심부의 담론장에서는 벗어난 비주류 학파로 분류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업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비서구 국제정치학, 서발턴 리얼리즘 등과 같은 대안적인 이론들을 소개한다.
“학생들이 접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새로운 분석 틀이나 이론들을 소개하면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주류 이론이나 통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대안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아요. 교육자로서 새로운 시각들을 열심히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 은용수 교수는 활발히 집필 활동을 하는 교육자다. 지난해에도 세계적인 학술 출판사인 팔그래이브(Palgrave)와 스프링서(Springer)에서 <정체성에 관한 존재론적 논고(An Ontological Rethinking of Identity in International Studies)>를 출간하는 등 꾸준히 새 책을 출판해 왔다. 그 결과 2019 HYU 학술상, 2021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상, 2024 한양대학교 우수 저서상 등을 수상했다.
“공부를 제 업의 소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될 수 있고요. 그래서 계속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결과물로써 책을 출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대안적인 시각, 주류의 담론장에서 주변화된 시각들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해나갈 생각입니다.”
주류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좋은 문제(Good Trouble)’를 끌어올리는 ‘좋은 문제아’이고 싶다는 은용수 교수. ‘좋은 문제’란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개념이며, 상상력이란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거나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해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다. 인터뷰 말미, 은용수 교수는 한양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상상력을 키우라”는 주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