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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윤 명예교수의 삶은 우리나라 학문의 초석을 쌓은 선구자들의 발자취와 맞물려 있다. 1976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프랑스 전력공사 전력연구원(EDF Renardiere)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1985년 해외 과학자 유치 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제 인지도는 50위권 밖이라, 개인의 미래를 위해서는 선진국에서 커리어를 쌓는 게 좋을 터였다. 하지만 구자윤 명예교수는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망설임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그렇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선임연구원을 거쳐, 1988년 한양대 ERICA캠퍼스 교수로 부임했다.
“지난 2016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학교는 떠났지만 여전히 ‘조직의 가치 상승이 나의 가치 상승이다’라는 마인드로 달리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나라 전기에너지산업 관련 대학 교육과 기업의 취약성을 절실히 인지했기에, 교수이자 엔지니어로서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던 것 같아요. 기술자립 현실화 여건 형성을 위해 선도기업 경영진들에게 자체 기술역량 향상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정책 입안 그룹에 직언하고자 다방면으로 봉사했습니다.”
구자윤 명예교수는 한양대에서 후학 양성에 힘 쏟았을 뿐 아니라 국내 전기에너지 분야 성장과 산업 역량 개발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과학기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지역협력연구센터(RRC) 단장을 맡아 1050편의 논문 발표, 국외 16건 및 국내 66건의 특허 등록, 20개의 벤처 창업이라는 기록을 이뤄내며 2001년 과학기술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07년에는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지원으로 ‘퓨전 전력기술 응용센터’를 설립해 한양대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차세대 전력기술 개발을 위한 기본 장비 및 역량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산업자원부 전기위원회 위원장, 대한전기학회 회장, LS전선 사외이사, 한국전력 사외이사 등을 맡아 국내 중전기 산업 성장에 봉사했다.
1921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립된 CIGRE(Conseil International des Grands Reseaux Electriques, 전력망 국제기구) 활동을 통해 한국 및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기술역량 향상과 시장진출 확대에도 앞장서 왔다. CIGRE는 103개 회원국에서 1250개 단체(전력회사, 기업, 대학, 연구기관)가 참여하는 전기에너지산업 분야 최대 규모 글로벌 플랫폼이다. 국제전기표준회의(IEC)의 국제표준도 CIGRE 16개 분야 연구위원회 산하 250개 다국적 워킹 그룹의 공동연구를 통해 마련되는 만큼, 세계 시장에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제기구다.
“전기에너지산업 기술 후발국가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도 기술 선진국의 소비시장으로만 존재하고, 국제 커뮤니티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여건을 개선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죠. 또 국내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겪곤 하는데, 국제 기술 트랜드를 읽는 전문인을 양성하고 국가 인지도를 확대해야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구자윤 명예교수는 기술 선진국 리더들을 설득해 2000년 CIGRE 본부에 ‘AORC(Asia-Oceania Regional Council,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협의회)’를 창립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005년 아시아 국가들이 중심이 된 ‘CMD(Condition Monitoring & Diagnosis, 상태감시진단)’ 기구 창립 및 2015년 ‘아시아 초고압직류송전(HVDC) 콘퍼런스’ 창립도 그의 구상에서 추진됐다.
그는 한국인 최초, 아시아인 최초의 업적들로도 유명하다. 2006년 CMD의 최초 학술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1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국제 고전압 심포지엄(ISH)’ 회장에 선임돼 관련 행사를 우리나라에 유치했고, 2018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 초고압직류송전(HVDC) 콘퍼런스 회장을 맡았다. 2019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전력케이블(Jicable) 기술 국제포럼’ 회장에 당선돼 국위를 선양했다.
이렇게 구자윤 명예교수가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전기에너지 기술 향상과 글로벌 시장 진입을 위해 노력해 온 공로는 다수의 국제기구상으로 이어졌다. 2021년 한국인 최초로 ‘CIGRE 명예회원상(Honorary Member Award)’을, 2023년 아시아 대학교수 최초로 ‘세계 고전압 공학인상(Hans Printz Award)’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지난 8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4 CIGRE 개회식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CIGRE 최고 명예상인 ‘CIGRE 메달(Medal Award)’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상징으로도 의미가 크다.
“전기에너지 분야 글로벌 커뮤니티가 수여하는 최고상을 받아, 개인적으로 지난 40여 년의 노력과 열정이 가치 있었음을 인정받는 것이라 무척 기쁩니다. 또 대한민국 전기에너지산업 기술역량 향상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으로 국가적으로도 의미 있는 영광입니다.”
70세가 넘은 나이, 구자윤 명예교수는 자신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인지도를 높여 후학들이 조금 더 편안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기여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전했다. 더불어 전기에너지산업이 다양한 산업의 동력이므로 국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하며, 최근 우리나라 전기산업 경쟁력이 우리를 추종하던 중국에 뒤처져 걱정스럽다고 밝혔다.
“에너지 정책은 50년 앞을 내다보고 제정해야 합니다. 정권에 따라 방향성이 바뀌면, 라이프사이클이 긴 전력산업은 성장할 수 없어요. 국가 전력산업의 중심이 돼야 할 한전이 누적된 대규모 적자로 투자 여력이 축소된 것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면입니다. 기업경영진 인식도 관리경영에서 기술경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가가치 높은 핵심기술은 시간과 인력, 인내와 재원 투자가 지속돼야 얻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양대의 발전을 위해서도 직언을 남겼다. 엔지니어링 분야 대학의 역할은 산 · 학 · 연 협력으로 국가 산업역량 향상에 기여하는 우수 인력을 공급하는 것. 따라서 학생들이 기본에 충실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것은 기초가 중요합니다. 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학문 분야와 외국어, 컴퓨터 역량은 미래를 개척해갈 엔지니어의 핵심 무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 취업을 위해 학생들을 이끄는 우리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지난 50년을 돌이켜보면, 오늘의 산업 환경은 20~30년이 지나면 크게 변화하고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도 달라집니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단정할 수 없어요. 따라서 기초학문은 미래 기술에 순조롭게 적응하고 아울러 미래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역량 형성의 동력입니다.”
구자윤 명예교수는 학생들에게 인생이 아날로그라는 것을 꼭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무엇이든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가 됐지만, 그럼에도 인생은 여전히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다.
“인생은 원한다고 점프할 수 없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야 해요. 역량이 뛰어나면 단지 그 시간이 조금 단축될 뿐입니다. 정직하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길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는 항상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아 헤맨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신문기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살며, 창조하라. 눈물이 나도록 살라(Men must live and create. Live to the point of tears.)’고 말했다. 가치를 만들고, 후회 없이 열정을 발휘하는 삶. 카뮈의 글귀 그 자체인 구자윤 명예교수의 삶을 보며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