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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현대적인 작가
헨리크 입센의 정수를 전하다

연극영화학과 김미혜 명예교수

  • 글 박영임
  • 사진 손초원
‘현대극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헨리크 입센’은 전 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극작가다. 하지만 그 위상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김미혜 교수는 15년에 걸쳐 헨리크 입센의 희곡 전집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 헨리크 입센의 작가 정신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 입센

김미혜 교수가 지난 8월 노르웨이 하랄 5세 국왕에게 받은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과 휘장을 소중히 꺼내 보였다. 이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전집을 번역해 한국에 알린 공로로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받은 것이다.

“영광스럽습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국내 최초로 받은 것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번역 작업을 할 때는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할까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열정을 저버리지 않은 결과를 끝내 보상받은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인형의 집’으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 하지만 대개 헨리크 입센에 대한 지식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가 노르웨이의 작가인 것도, 그 외 어떤 작품을 썼는지도 알지 못한다. 독일이나 미국, 일본에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셰익스피어만큼은 아닐지라도 헨리크 입센은 20세기를 연 대단히 중요하고 혁신적인 작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기초적인 자료조차 미비한 실정이죠.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입센 연구센터에 중국과 일본 자료는 있는데 한국 자료는 없더군요. 그런 현실을 반성하면서 후대를 위한 토대라도 만들기 위해 입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작품을 직접 번역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헨리크 입센이라는 작가에 대한 입문서라도 출간하자는 생각으로 2007년부터 영어와 독일어로 된 헨리크 입센의 희곡과 관련 도서, 논문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2010년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이라는 제목으로 평전을 출판했다. 그러나 김미혜 교수의 헨리크 입센에 대한 열정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평전을 쓰기 위해 수집한 자료 중 때때로 영어로 된 텍스트와 독일어로 된 텍스트가 다른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노르웨이어로 된 원문에는 도대체 어떻게 쓰여 있을까. 김미혜 교수의 늦깎이 노르웨이어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김미혜 교수는 이미 환갑을 지난 나이였다.

나이 60에 시작한 노르웨이어 공부

영문학을 전공한 김미혜 교수는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까지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재능이 뛰어난 편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외국어에 도전하기까지 꽤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이 없더군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전날 공부한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도 영어, 독일어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 용기를 내보기로 했죠. 당시만 해도 노르웨이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어 영어와 독일어로 된 교재로 독학해야 했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전집을 번역할 때 최대 난관은 바로 노르웨이어였다. 노르웨이어-영어 사전과 노르웨이어-독일어 사전을 펼쳐놓고 우리말로 번역하자니 생각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번역하는 데 8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 사이 정년도 맞았다. 하지만 퇴임 후에도 퇴임 전과 똑같이 번역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김미혜 교수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번역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발화는 일종의 약속이므로 중도에 그만두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출판사에 원고를 넘길 때까지 가족에게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김미혜 교수의 열정은 애초에 쉽게 꺾일 것이 아니었다.

“노르웨이대사관에 찾아가 입센의 희곡을 번역하고 있으니 후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돈이 필요했다기보다 후원금을 받으면 그에 대한 책임감으로 끝까지 완주할 테니까요. 번역 작업이 너무 어려워서 이대로라면 포기할 것 같았습니다. ”

15년에 걸쳐 헨리크 입센의 희곡 전집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한 김미혜 교수는 지난 8월 노르웨이 하랄 5세 국왕으로부터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과 휘장을 받았다.

열정 쏟는 시간이 행복

8년이라는 번역 작업 기간에 비행시간만 장장 16시간이 걸리는 노르웨이를 4번이나 다녀왔다. 지적 상상력이 고갈될 때는 직접 눈으로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번역에도 상상력이 요구됩니다. 번역이 막힐 때는 작가가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되기를 바랐을까를 상상해보는 것이죠. 이것이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희곡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바다에서 온 여인’이라는 작품에는 여주인공이 죽은 아이의 눈이 바다색을 닮았다고 말하는 장면 있습니다. 제가 본 노르웨이의 바다색은 맑았는데 왜 죽은 빛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결국 노르웨이로 향했죠. 그런데 노르웨이의 가장 북쪽,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노르드 곶(Nordkapp)의 바다는 정말 짙은 회색빛을 띠더군요.”

지난해 총 10권으로 번역돼 출간된 헨리크 입센의 희곡 전집은 이렇게 김미혜 교수의 열렬한 애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헨리크 입센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하면 15년이 걸린 셈이다. 김미혜 교수의 헌신과 열정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작가의 어떤 면이 어느덧 고희를 넘긴 김미혜 교수의 열정을 이리도 부추긴 것일까.

“헨리크 입센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 새롭게 해석이 가능한 작가입니다. 19세기 작품이지만 ‘헤다 가블레르’의 여주인공은 매우 현대적이며, ‘사회의 기둥들’이라는 작품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현대와 맞닿은 부분이 많아 번역하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작품들은 이렇게 왕성한 생명력으로 시간을 관통하는데 그동안 영어를 중역한 희곡에 의존했으니 제대로 이해하지도, 알리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제야 입센 할아버지를 졸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김미혜 교수. 비로소 정년 후의 안식을 취할 수 있을까. 김미혜 교수의 맹렬한 열정은 아직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또 다른 번역 작업에 들어갔으며, 더 늦기 전에 소설과 희곡 창작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신춘문예 최종 심사까지 올랐던 소싯적의 작가 지망생 김미혜 교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작가에 대한 열망이 움트고 있다.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보내면 뿌듯하잖아요. 무엇이든 열심히 하다 보면 눈이 딱 떠지는 개안의 순간을 만나게 되죠. 우리 한양인들이 너무 전공 공부만 파고들지 말고, 독서도 하고 전시도 보며 다양한 경험을 쌓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글로벌 시대에 맞는 개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대학 시절은 사회로 나가기 전에 사회성을 배우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니까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법을 잘 배워나가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글로벌 리더가 될 한양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 김미혜 교수. 누구보다 열정 가득한 김미혜 교수의 힘찬 기운이 한양인들에게도 나눠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