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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새로운 법
AR의 혁신을 이끌다

‘레티널(LetinAR)’ 김재혁 대표 (산업공학과 13)

  • 글 박영임
  • 사진 이현구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16년 김재혁 대표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AR 렌즈를 개발하는 ‘레티널’을 창업했다. 그리고 이듬해 ‘한양대학교 스타트업관’에 참여하며 CES에 데뷔했다. 당시엔 언젠가 전 세계 관람객을 대상으로 신제품 발표회를 열 날을 꿈꿨었다. 어느새 그 꿈을 실현한 것은 물론, CES 혁신상까지 받은 김재혁 대표. 그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스마트글라스’는 넥스트 스마트폰

지난 1월 세계 최대 IT 박람회 CES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최대 규모로 열렸다. 올해 박람회에서는 처음으로 메타버스관이 별도 구성됐는데, CES 2023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레티널의 증강현실(AR) 광학 렌즈 모듈 ‘케플라(KEPLAR)’가 혁신상을 거머쥐었다. 레티널의 혁신상 수상은 2022년에 이어 두 번째다. 김재혁 대표는 관람객들의 관심이 대단했다며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저희 부스가 전시관 구석에 있어 걱정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메타버스의 열기가 그만큼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평소 메타버스가 현실화하려면 그에 맞는 디바이스가 개발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CES에는 하드웨어 업체들이 대거 참가했더군요. 스마트글라스 같은 디바이스가 새로 출시돼 일상과 가상을 좀 더 편하게 오갈 수 있어야 메타버스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메타버스의 세계로 진입하는 게이트웨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글라스는 안경과 같이 생긴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렌즈 너머로 증강현실 콘텐츠를 구현해주는 일종의 컴퓨터다. 안경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를 검색·출력한다든지, 현실과 가상 콘텐츠가 결합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조작하는 등 SF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집에서 이미 스마트글라스를 쓰고 영화를 보며 빨래를 개곤 한다는 김재혁 대표.

“스마트폰은 디바이스만 주시해야 하고, 손으로 작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새로운 디바이스가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스마트글라스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글라스를 사용하면 두 손이 자유로워지죠. 사실 메타버스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스마트글라스가 지향하는 바는 메타버스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앞으로 스마트글라스와 관련된 솔루션, 디바이스들이 대거 출시돼 스마트폰처럼 일상에 녹아들 것입니다.”

핀홀 원리에 착안해 AR 렌즈 모듈 개발

이름만 대면 모두 알만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스마트글라스에 장착되는 AR 렌즈 모듈을 개발하는 레티널의 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존 스마트글라스들은 무겁고 전력 소모가 많으며 시야가 좁고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아 번번이 시장에서 낙제점을 받았었다. 그러나 레티널은 이러한 문제들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레티널의 AR 렌즈 모듈은 작은 구멍을 통과한 빛이 선명한 상을 만드는 핀홀 원리를 활용해 뚜렷한 상을 보여주는데, 렌즈 상부에 OLED 디스플레이를 부착하고 그 화면이 핀미러에 반사돼 우리 눈에 들어오는 원리다. 이를 통해 깨끗한 상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핀틸트라는 새로운 기술을 결합, 저전력에 플라스틱 소재로 경량화하는 데도 성공해 2년 연속 CES 혁신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레티널의 기술력을 일찍이 알아본 네이버는 2017년 5억 원의 투자를 집행했다. 이듬해인 2018년에는 카카오벤처스, KB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했으며, 올해는 150억 원 이상 규모의 시리즈 C 투자까지(누적 320억 원 내외)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다.

이렇게 넥스트 유니콘으로 촉망받는 레티널은 2016년 한양대 창업보육센터의 지원을 받아 HIT(한양종합기술연구원) 지하의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학창 시절, 미래의 디스플레이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관심이 많았다는 김재혁 대표. 그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과학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던 단짝 친구가 있다. 바로 공동창업자인 하정훈 CTO다.

“친구가 어느 날 일식 사진을 찍다가 나뭇잎의 작은 구멍을 통해 바닥에 생긴 달의 상을 발견했고, 이것을 보며 핀홀 원리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이 원리를 AR 글라스에 적용하면 선명한 상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친구와 함께 2015년 정부 지원 과제에 선정돼 기술 개발을 시작했고,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16년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레티널은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사진은 세계 최대 이동통신 전시회인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19’ 참여 모습.
레티널의 증강현실(AR) 광학 렌즈 모듈 ‘케플라(KEPLAR)’가 세계 최대 IT 박람회인 ‘CES 2023’에서 혁신상을 거머쥐었다. 레티널의 혁신상 수상은 2022년에 이어 두 번째다.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일

창업 이듬해부터 대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마냥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은 레티널도 스타트업의 무덤이라 불리는 ‘죽음의 계곡(초기 기업이 아이디어, 기술 개발에 성공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상용화에 실패하는 상황)’은 피하기 어려웠다. 2020년 코로나19로 금융시장이 급격히 경색되면서 한동안 신규 투자를 유치하는 데 애로가 많았던 것.

“기술 개발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창업 후 5년 동안은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죠. 하지만 저희의 기술이 언젠가는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나아갔더니 저희의 생각에 공감하고 응원해주는 분들을 만나게 되더군요.”

김재혁 대표의 말에 레티널 사무실 출입구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인류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바로 레티널의 미션이다. 얼핏 원대한 포부로 보일 수 있겠으나 이 미션을 달성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해부터 레티널의 광학 모듈을 찾는 고객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해 주문량 기준 20억 원의 매출에 이어, 올해는 1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향후 레티널의 AR 광학 기술은 플랫폼뿐 아니라 의료,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2024~2025년이면 스마트글라스가 상용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에 시설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기업공개(IPO)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는 목표를 달성한 이후요? 그때도 기술로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일을 찾아야죠. 시장에는 부정적인 얘기들이 많습니다. 근데 위기는 정말 기회더군요. 한양인들도 소신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분명 길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와 단둘이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시작했던 회사는 어느덧 6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젊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회사 곳곳에는 레티널 직원들이 공유해야 하는 11가지 매너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전 세계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다.’ 이것이 그 첫 번째 매너다. 세상에 없던 제품은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라는 레티널의 사명감과 자부심이 잘 전달된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이들의 열기가 뜨겁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