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roll Down
캐나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라다. 하지만 캐나다가 한국전쟁 3대 파병 지원국 중 하나라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양국 정상회담에서 지정한 ‘2024~2025 한국-캐나다 상호 문화 교류의 해’를 기념하고, 우정과 문화로 연대를 강화하고자 양국의 청년 예술인들이 교류하는 색다른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가평전투’의 실화를 바탕으로 양국의 미래세대가 함께하는 창작뮤지컬 <링크(R;LINK)>의 공동 제작이 이뤄진 것이다. 가평전투는 캐나다군을 주축으로 한, 영(英)군이 대승을 거두며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한 전투(1951년 4월 23~25일)로 한국전쟁 중에서도 성공적인 전투 사례로 회자된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양대학교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공동 주관으로 진행됐다.
<링크> 프로젝트에는 한양대(연극영화학과)와 캐나다 3개 대학(서스캐처원 대학교 연극학과, 카필라노 대학교 연극학과, 퍼스트 네이션스 캐나다 대학교 예술학과)이 참여했다. 재학생을 비롯한 청년 배우 13명이 배우로 참여했고, 기획과 연출, 음악, 안무, 무대, 조명, 의상, 분장, 영상, 코칭 등 51명에 달하는 창작진이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 3월 21일 가평 캐나다전투기념비 앞에서 이뤄진 발대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6월 16일부터 7월 25일까지 뮤지컬 작품 공동개발 및 리허설이 진행됐다. 7월 26~27일 양일간 한국(광화문 CKL스테이지)에서 먼저 막이 올랐고, 8월 15~16일에는 캐나다 현지(밴쿠버 블루쇼어 극장)에서도 공연이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캐나다 군인은 약 2만 7천 명이었는데 그중 대다수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들이었다. 두려운 전쟁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캐나다에서 직접 가져온 아이스하키 장비로 얼어붙은 강 위에서 하키 경기를 벌이며, 한국군과 함께 청춘과 열정을 나눴다. 뮤지컬 <링크(R;LINK)>는 한국전쟁 당시 실제 캐나다 군인들이 행했던 ‘아이스하키 경기’라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전쟁을 견뎌낸 청년들의 꿈에 관해 이야기한다. 언어조차 통하지 않았던 캐나다인과 한국인. 하지만 그들은 ‘스포츠’를 통해 하나가 됐고, ‘자유’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결속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양국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홍보됐다. 한양대는 국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주도한 기관으로서 글로벌 위상을 강화하고, 문화예술 중심 대학으로 각인되는 기회를 마련했다. 또 캐나다 3개 대학과 교류함으로써 신규 국제 협력 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퍼스트 네이션스 캐나다 대학과의 협업은 캐나다 토착 문화 및 원주민 공동체와의 연대를 바탕으로 문화적 다양성 존중이라는 가치까지 실천하게 했다. 창작뮤지컬 <링크(R;LINK)>는 과거를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청춘의 연대’를 보여주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호평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2025년 8월 16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뮤지컬 <링크>의 막이 내렸다. 대장정의 끝이었다. 그곳에서 받은 뜨거운 박수를 품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야 정말 끝이라는 실감이 났다.
지난해 12월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이 뮤지컬의 오디션 공고를 봤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요동침을 느꼈다. ‘우리 학교 연극영화학과가 외국에 나간다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이 공연은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캐나다군과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다. 유엔군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한 캐나다군. 그중에서도 가평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PPCLI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풀어낸다는 사실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특히 우리나라뿐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공연을 펼친다는 사실이 정말 의미 있게 느껴졌다. 먼 타국에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나는 주저 없이 오디션에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명호’라는 배역을 연기하게 됐다.
2월 말, 성수의 아이스링크장에서 하키 교육부터 시작됐다. 3월 발대식을 거쳐 본격적인 리허설에 들어갔다. 춤,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뮤지컬의 특성상 연습해야 할 것이 정말 많았다. 연출을 비롯한 창작진과 함께 날마다 대본을 분석했고, 신(Scene)을 만들었고, 음악과 안무 연습을 병행했다. 우리는 방대한 창작 과정을 짧은 시간 안에 겪으며, 수많은 창작진과 학생 배우, 스태프의 노력으로 젊은 연극제 참가작 교내 공연을 완성해 냈다. 그리고 그 창작물을 바탕으로 캐나다 학생들과의 본격적인 협업을 시작했다.
한양대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처음 캐나다 친구들을 대면하던 날의 어색한 공기가 기억난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면 혹시 실례가 될까, 얼마만큼 다가가도 되는 걸까에 대한 주저함이 앞섰다. 낯을 가리는 느낌과는 달랐다. 앞으로의 두 달이 갑자기 실감나며 난항이 예상됐다. 실제로 기존 연습 과정이나 극장 수칙을 캐나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적용할지부터 시작해, 연습 시간과 전체적인 스케줄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해야 할 것은 많았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해질 새도 없이 연습에 들어갔다. 캐나다군 배우들은 안무와 음악을 모두 처음부터 익혀야 했기에 주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오후 시간을 연습에 쏟았다. 한국군 배우들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함께 장면을 맞춰 나갔다. 스케줄을 소화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라 그 누구도 가까워지기 위한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리는 함께 경복궁에 가게 됐다. 교수님께서 캐나다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 캐나다 측에서 자신들의 전통요리를 보여주겠다며 음식을 대접해줬다. 함께 맛있게 밥을 먹고 지하철을 이용해 경복궁으로 향했다. 캐나다 친구들에게 멋진 경험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타국에서 공연 준비를 하며 고생하는 그들에게 한국은 사실 이런 곳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경복궁뿐 아니라 인사동과 북촌까지 낱낱이 구경하고, 맛있는 식사와 빙수까지 먹었다.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연습이 끝나면 함께 한강에 가 치킨을 먹거나 노래방에 가기도 하고, 다른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캐나다 원주민의 날에는 한국 음식과 캐나다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며 선물도 주고받았다.
나는 극 중에서 한국군과 캐나다군이 서로 친해지는 과정을 직접 겪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었다. 친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나니, 연습 분위기 또한 훨씬 편안해지고 즐거워졌다. 분명히 보이지 않던 하나의 벽이 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습 때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할 수도 있게 됐고 중간중간 농담을 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CKL스테이지에서의 한국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우리는 캐나다 공연을 위해 다시 한번 심기일전했다.
캐나다에서는 또 새로운 과제를 맞이해야 했다. 약 일주일 남짓한 기간 안에,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외국 극장에서 모든 테크니컬한 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올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압박감을 느꼈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셋업을 하고 연출의 지휘하에 환경이 다른 극장에서 현지 상황에 맞게 세세한 것들을 수정해 나갔다. 저장된 조명 메모리가 시스템 오류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공연 몇 시간 전에 정전이 되는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나에게는 이제 캐나다 배우들이 그냥 그들 자체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캐나다인들로 보였다. 우리는 이 공연을 꼭 해내야만 했다. 모두가 책임감을 나눠 가졌고, 이 공연을 정말 잘 올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들이 느껴졌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커튼콜 곡이 나오고 관객들 모두가 기립했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지난 6개월을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링크’를 겪었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어떻게 관객들에게까지 닿았는가. 단순히 ‘기억하자’를 넘어, 참전용사분들의 희생에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며 살아야 할까. 사람마다 느낀 것은 달랐겠지만, 분명한 것은 관객들에게 뜨거운 무엇인가가 전달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두의 노력과 마음을 모아 이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를 무사히 전달한 것 같았다.
<링크>를 통해 잊고 있던 감정과 무대 위의 뭉클함이 다시 끓어올랐다. <링크>는 나에게 큰 성장과 보물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소중한 공연이다. 무엇보다 나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해외여행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교내 공연 때 만난 인연들부터, 캐나다 창작진들, 관객들과의 연결을 통해 나는 나를 탐색할 기회를 얻었고 다 함께 하나를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임을 느끼게 됐다. 이 글을 빌어 공연을 기획하고 만들어주신 모든 관계자와 창작진, 친구들, 그리고 참전용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