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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커피로 음미하는 나의 감정’
예술에 테크를 더하다

미디어아트 작가 이승정 동문(아트테크놀로지대학원 18)

  • 글 박영임
  • 사진 손초원
예술이란 미적 작품을 창조하는 인간의 활동을 이르는 말이다. 이 예술이라는 단어에는 기술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아트 작가인 이승정 동문의 작품은 기술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사례다. 감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감각으로 표현하는 이승정 동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만나본다.
사람에 대한 성찰,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통해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이승정 동문.

감정을 커피 맛으로 표현한다면?

관람객이 거울 속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동안 센서로 손바닥의 땀 분비량을 측정한다. 이를 통해 감정의 변화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그중 가장 몰입했던 순간의 감정을 쓴맛, 단맛, 신맛 등 미각으로 변환한 후 그 맛에 해당하는 원두를 조합해 커피를 내려준다. 그렇게 건네받은 커피 한 잔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감정이다. 과연 그 맛은 어떨까?

“현대인들은 잠들 때까지 SNS로 타인의 모습을 보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그럼 하루 중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나만의 맞춤형 감정 커피라는 콘셉트의 작품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해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023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DDP 오픈큐레이팅 vol.27, ‘애즈 유어 위시(As Your Wish)’ 단체전에 <탠저블 이모션_리플렉션(Tangible Emotion_Reflection)>이라는 작품으로 참가했던 이승정 동문이 작품 의도를 설명했다. 전시 기간에 1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는데, 관람객들은 모처럼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가 됐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더러는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됐다는 관람객도 있었다. 여느 예술 작품들처럼 관람객에게 성찰과 감동이라는 카타르시스 경험을 선사하지만, 이 작품에는 감정을 생리적 데이터로 측정하는 기술과 이를 다시 미각으로 전환하는 알고리즘 등 첨단 기술이 반영됐다.

“예전에는 설문지를 활용했는데 기술의 발달로 뇌파, 땀 분비량, 심박수, 동공의 움직임 등 생체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다 정교하게 감정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측정한 감정을 오감 중 미각, 그것도 커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전 버전에서는 6개의 키네틱 LED 바에 색깔을 담아 시각화하는가 하면, 앰비언트 사운드로 청각까지 구현했다. 그야말로 ‘탠저블 이모션(Tangible Emotion; 만져서 알 수 있는 감정)’이라는 작품명처럼 감정을 공감각적으로 유형화한 것이다.

미디어아트 랩 ‘얼스(3ARTH)’ 로고.
이승정 동문은 한양대 아트테크놀로지대학원에서 만난 동기 둘과 뜻을 모아 ‘얼스’를 결성했다.

예술을 사랑한 공학도

이처럼 최근에는 테크를 도입한 예술 작품들이 예술의 표현 영역을 넓혀주고 있다. 이승정 동문이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아트 분야도 미디어를 미술에 결합한 분야다. 이승정 동문이 이렇게 첨단 기술에 밝은 이유는 그가 공학도 출신 작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은 까닭이다.

“학부 때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사실 10대까지만 해도 미술관보다 과학관이 더 친숙했죠. 그러다 학부 시절 공모전 정보를 알아보다가 미디어아트라는 분야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더군요.”

마침내 가슴을 뛰게 하는 분야를 만난 이승정 동문은 2018년 서른의 나이에 한양대 아트테크놀로지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막상 입학해 보니 생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인간과 컴퓨터 간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산업공학의 HCI가 주 연구 분야였다. 그러나 한양대에 입학한 덕분에, 이승정 동문처럼 예술에 관심이 많은 공학도 출신 동기 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미디어아트 랩 ‘얼스(3ARTH)’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원 시절, 셋이 같은 지도교수님 밑에서 매일 붙어 다녔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날밤을 새우며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저희 모습을 보고 지도교수님께서 ‘너희 얼간이들 같다’며 놀리시더군요. 얼스라는 팀명은 거기서 따온 것입니다.”

이승정 동문이 막연하게 품고 있던 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게 된 것은 이렇게 얼스라는 팀으로 활동하면서부터다. 같이 작품을 만들어보기로 한 얼스는 2019년 콘텐츠진흥원의 콘텐츠 임팩트 교육 지원사업에 참여해 <탠저블 이모션>의 프로토타입을 구상하게 됐다. 당시 대학원에서 생체 데이터로 감정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터라 이를 응용해 감정과 감각 사이의 상관관계를 예술로 구현하기로 한 것이다.

초기에는 VR 장비를 착용한 후 파티클 형식의 영상을 시청하는 동안 뇌파 데이터를 측정해 쾌와 불쾌, 몰입감 정도를 분석한 후 6개의 LED 바를 연결해 색깔의 변화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듬해 이를 발전시킨 <탠저블 이모션> 버전 1로 2020년 넥슨컴퓨터박물관에서 개최한 ‘NCM 오픈콜 버추얼 리얼리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한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좋은 평가를 받아 작품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희의 강점은 생리학적 데이터를 정교하게 감정으로 표현하는 독보적인 기술력에 있습니다.”

“독보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첨단 기술과 예술을 융합한 인터랙티브 아트를 선보이며 ‘얼스’만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기업과 협업하며 사업화 기회도 모색

현재와 같이 미각을 추가하게 된 것은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과 기술 융합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다. 시각, 청각, 후각에 비해 미각을 활용하는 사례는 흔치 않기 때문에 창작자의 도전 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금이나 설탕으로 표현하는 것은 관람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어렵다. 그때 떠올린 것이 커피였다. 그리하여 <탠저블 이모션>의 커피 블랜딩 머신 버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작품에 커피 블랜딩 머신을 결합하자 사업화도 모색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2023년 DDP 전시장에서는 원두 로스팅 업체인 곰발커피와 협업해 원두를 함께 판매했다. 이는 일반 원두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담은 원두이기에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디어아트 랩 얼스는 이렇게 기술과 예술을 융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사업화로 연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나이키와 삼성전자, 몽블랑, 현대백화점 등 다양한 브랜드들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며 인터랙티브 아트를 선보여 왔다. 바야흐로 기술과 예술,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진 빅블러 시대가 아닌가. 현재 얼스는 감정을 측정한 후 그에 따라 커피 원두를 블랜딩해주는 키오스크를 개발하는 중이다. 개발을 완료하면 다양한 매장에 커피 블랜딩 키오스크를 보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공학도의 궤도에서 비켜났지만, 공학도로서 쌓은 기반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자산이 됐다.

“대개 공학도들은 정해진 길을 걷게 되죠. 학교를 졸업한 후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목표인 경우가 많은데, 한양대 안에는 연극영화학과나 무용과 등 다양한 학과가 있으니 다른 과 강의도 폭넓게 들으며 타 분야와 교류하고, 한 걸음 더 멀리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기회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인데, 전시나 사업화 의뢰가 이어져 미디어아트 신에서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는 이승정 동문. 계속해 이어질 그의 종횡무진을 응원한다.

이승정 동문은 인간의 감정을 과학적인 생체 데이터로 측정, 분석한 뒤 이를 감각으로 표현한다. 나만의 맞춤형 감정 커피는 큰 이슈가 됐다.